수락산의 물줄기에 손을 담그고 세상의 번뇌를 씻는다.

시작이라는 말은 한결같아 미쁘다.

세계인의 관광코스가 된 도성의 남쪽 산 남산(南山)과 청와대와 권력의 핵심부가 밀집한 북악산(北岳山)이 서울의 중심을 이룬다면 북한산, 도봉산, 관악산, 청계산, 수락산, 불암산은 서울과 경기도에 걸쳐 있으면서 수도권의 젖내와 물빛을 고스란히 반사하고 있는 귀한 보물들입니다. 폭포와 기암괴석의 산이자 난이도가 있어 초보등린이에게는 결코 쉽게 얼굴을 허락하지 않는 산, 단순히 물이 떨어지는(水落) 것만 아니라 바람에 실려 안개도 되고 뭉게구름도 되어 영롱한 산의 빛깔을 등산객의 이마에 비춰주는 향기로운 산, 수락산의 발등에 손을 얹어봅니다.

서울과 의정부, 남양주에 걸쳐 있는 수락산은 인근 북한산이나 도봉산과 비슷한 해발 638m수락산의 물줄기에 손을 담그고 세상의 번뇌를 씻는다. 주봉을 가지고 있는 명산이에요. 흔히 북한산 도봉산 관악산과 수락산을 서울근교의 4대 명산이라고 하니까요. 청계산 산행기에서 말한 강북5산 종주산행 15시간의 대역사를 이루는, 불수사도북(불암 수락 사패 도봉 북한)의 전개 또는 클라이맥스가 되는 산입니다. 등산장갑을 필수로 하고 밧줄 잡고 70°가 넘는 바위산을 오르며 초보자에게는 오줌을 지리게 하고 산꾼에겐 오르락내리락 근육강화 훈련장이 되기도 하는 기차바위(홈통바위)와 도정봉의 스릴이 있고, 철모바위와 코끼리바위 등의 볼거리가 풍부한 낭만과 고혹의 산이기도 하지요. 산은 항상 거기에 있어 그곳으로 가야 하지요. 그래서 외롭지만 고마운 겁니다. 마치 언제나 그 자리에서 미소로 반겨주는 늘 푸른 소나무와 같은 정겨운 이웃처럼 말입니다.

오르려는 의지는 스스로를 배반하지 않는다.

7호선의 종점 장암역에서 수락산은 제 등허리를 내어줍니다. 출구가 하나 밖에 없는 역사는 깨끗하고 정갈하지만 어딘가 외로움을 타는 듯이 보입니다. 출구 뒤쪽으로는 눈에게 바라봄의 미학을 적당히 던져주면서 한 손에 잡힐 듯이 매혹적인 도봉산이 자태를 뽐내고 있네요. 저 안에서 최고봉인 자운봉(紫雲峰:739.5m)과 만장봉(萬丈峯) 선인봉(仙人峯)이 오봉(五峯)과 여성봉(女性峰)을 취하며 암벽을 타고 있겠지요. 관음암에서 면벽수도 하던 무학대사는 아직도 이성계에게 훈계를 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일명 석림사 계곡이라 일컫는 길을 따라 살짝 오르다보면 매월당 김시습이 단종 폐위 후 은거했다는 계곡에 세워진 작은 사찰인 석림사가 나옵니다.

장암으로 오르는 첫 번째 자리에 있는 사찰 석림사에 이르기 전, 김시습을 존경했다는 유학자 박세당이 세웠다는 충절사 터가 나오는데, 지금은 충절사의 정자였던 청풍정의 주춧돌만 남아 있고, 그 자리에 박세당의 아들인 유학자 박태보를 기리는 서울시 기념물 제41호인 노강서원(鷺江書院)이 남아 있었습니다. 석림사는 코로나로 인해 승려들이 자택근무를 자원(?)했는지 잠겨 있는 채 동종과 북소리에 번뇌만 끊고 있었고, 대원군의 탄압에도 남아 있던 노강서원은 이제 유생들이 없어 폐교한 듯 보입니다. 승려도 보살도 불목하니도 없는 절은 음산하고 공자왈맹자왈 유생들의 사서오경 독송소리가 멈춘 서원의 한가(閑暇)는 한량을 낳아 강북의 밤거리를 밝혀주고(?) 있었습니다.

남양주 별내로 오르는 청학코스의 경치가 그만이라고 하지만 버스 타고 지하철 몇 번 갈아타고 오는 산객에게는 수락산역이나 장암역이면 훌륭한 코스입니다. 수락산은 폭포와 바위로 이뤄진 산이지요. 하여 입구부터 온통 바위투성이입니다. 흙길을 선호하는 것은 바위나 계단 등반이 주는 피로의 무게가 줄어들기 때문이며 산림과 흙에서 나오는 자연의 향유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1쉼터에서 잠시 배낭을 내리고 물을 마시며 깔딱고개로 갈까? 기차바위에서 밧줄을 탄 후 정상인 주봉을 오를까? 고민 아닌 고민을 합니다만, 기차바위를 거쳐 주봉에 이르기로 후딱 정하고 땀을 닦습니다. 배낭을 동여매고 처음 발을 디딘 자리는 겨우 발 한 짝 들어갈까 말까한 틈의 등산로, 재는 걸음으로 예닐곱 보를 걸어 발을 디디니 등산로에는 어느새 눈처럼 떨어진 갈색 잎사귀가 포화를 이루어 바위를 포위하는 정경이 눈에 펼쳐집니다.

일단의 젊은이들이 호기 좋게 등산화도 아닌 운동화와 레깅스나 반바지 차림으로 멀리 기차바위가 보이는 전망 좋은 곳에 앉아 사진을 찍다가 단체사진을 찍어달라고 합니다. 주저 없이 셔터를 서너 방 눌러준 후 휴대폰을 넘겨 나의 모습도 찍힌 정경을 사진에 담습니다. 산마다 있는 유명 사진 포인트도 아닌데 주봉에 이르기 1km전에 이런 전망이 있어 셔터를 눌러댈 수 있다는 것은 산세가 그만큼 아름답다는 반증이겠지요. 멀리 바라본 도봉산에선 햇살이 봉우리를 때리고 있습니다. 잠시 쉬며 가져 간 사과 중 여분을 열어 젊음들에게 주니 곧바로 배낭 속에서 막걸리 한 통을 꺼내어 종이컵에 가득 따라 줍니다. 허허! 전문 산악인이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탁배기 한 컵에 웃음꽃이 창공을 가를 찰라, 청춘의 향기들은 하산(下山)을, 중년의 고독은 상산(上山)을 서두르며 감히 천자(天子)를 꿈꿉니다.

동막골 방향 이정표에서 100m 정도 떨어진 기차(홈통)바위로 가서 밧줄을 잡고 오르락 내리락 스릴을 즐기려고 갔으나 대기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포기하고, 대신 위험을 무릅쓰고도 스릴에 온몸을 던지는 용감(?)한 사람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같이 바람을 맞아주는 것으로 대신하며, 발길을 돌려 정상인 ‘주봉’으로 향합니다. 잠시 후 에는 주봉 입구 헬기장에 서서 사과 한 입을 베어 물고 삼삼오오 앉아 물고 뜯고 마시고 즐기고를 반복하는 등산객들의 웃음소리와 도란도란 거리는 수줍은 대화를 엿듣기도 했습니다. 오래 된 이정표가 350m 정상을 표시해줄 즈음, 발길은 어느새 정상 입구에 있는 세 그루 조선소나무의 위엄에 경배하며 정상인 주봉에 올라 있는 나를 비춰주었습니다.

주봉 표지석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행렬은 여전히 붐볐고 내가 사진을 잘 찍게 보였는지 사진을 찍어달라는 분들이 많았지만, 남겨야 할 유산처럼 간직하고픈 뿌듯한 기억을 위하여 정성스럽게 셔터를 눌러주고 덤으로 나의 사진도 끼깔 난 것으로 벌었습니다. 그러니 탁배기 한 잔이 왜 안 그리웠겠습니까. 손바닥에 2,000원을 들고 나름 수락산에서 유명세를 타고 있다는 주봉 정상의 부부 상인에게 다가가 한 잔의 막걸리를 멸치, 마늘쫑을 안주로 쭈욱 들이켭니다. 이런 것을 꿀맛이라고 부르죠. 그야말로 옥황상제나 염라대왕과도 함께 나누지 않을 맛이었습니다. 한동안 앉아 온 사방으로 탁 트인 조망을 눈에 담습니다. 계절의 순환에 따라 나름 성깔을 부리는 바람의 시위는 가져간 여분의 옷으로 다스리고, 미세먼지 탓으로 약간 흐린 조망을 손으로 후후 불어 롯데타워에서 코로나 정국에 키스하는 연인들도 체포합니다.

내려 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못 본 그 꽃

철모바위를 돌아내려오자 아예 천막을 치고 장사를 합니다. 등산을 마치고 적당히 즐기는 술자리를 정상 바로 아래에서 즐기다가 하산의 위험성을 어찌하려는지 갸웃할 즈음, 미상불(未嘗不) 부축까지 받고 나오는 등산객의 불콰한 얼굴과 가누지 못해 휘청거리는 몸짓을 보니 술을 좋아하는 나의 가슴도 철렁해 옵니다. 단속이 필요할 것 같은데? 안타까웠습니다. 수락산역 수락골 방향으로 내려가는 길에 참나무 6형제의 잎사귀를 헤아리느라 신경 줄을 놓은 사이 잘못 접어든 등산로는 낭떠러지로 향해 있었습니다. 아마 등산하며 최초로 겪는 시련이었을 겁니다. 오래 전 불암산 릿지 등반 당시 바윗길에서 구를 뻔했던 죽음의 기억보다 더 아찔하고 아슬아슬한, 거의 70° 경사의 계곡 길이 끝 간 데 없이 펼쳐진 낭떠러지를 내려오는 기분은 참으로 난감한 일이었습니다.

미끄러지면 바로 세상과의 이별을 고해야 할지도 모르는 낭떠러지를 스틱을 접은 채 거의 기거나 등짝을 붙이다시피하여 300여m를 내려왔을까? 길은 ‘새 광장’ 이정표를 가르치며 백운산악회가 몸을 만드는 체력 단련장에 도착해 있었습니다. 헛둘헛둘! 역기도 들고 아령도 들어 이완된 근육에 영양을 주사하려는데 산악회원들의 눈총이 온몸 구석구석을 찔러대는 통에 배낭을 슬그머니 짊어지고 내려오는 등산로에, 예전에는 7종이나 있었으나 지금은 겨우 3종만이 남아 있다는 ‘수락산의 양서류’ 표지판에서 숙연해집니다. 2008년에 설치한 표지판에는 ‘북방산개구리, 계곡산개구리와 도룡뇽’이 “등산객님들! 제발 저희들을 지켜주세요. 네?”하며 울고 있었습니다. 지켜야지요. 부끄러움은 이제 접고 녀석들의 흐느낌에 양심을 주어야지요.

오래된 다리인 장락교(長樂橋)를 지날 때는 이미 하산이 완료된 상태였습니다. 원래의 등산 계획대로라면 안부삼거리에서 용굴암갈림길을 지나 구암약수터에서 약수를 마시고, 만남의 광장으로 내려와 수락산의 명물이라는 [용순 씨의 가재울 수제비]를 맛보며 막걸리 한 잔에 ‘에헤라디여! 자진방아로 돌려라. 후이여!’를 노래할 예정이었으나, 길을 잃는 통에 없는 등산로를 만들며 골짜기를 타고 미끄러져 내려온 하산 길은, 상계 은빛3단지 아파트 방면으로 내려와 무려 20분을 더 걸어가서야 수제비와 동동주를 맛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도 천만 다행인 것이 생활의 달인에서 수제비의 달인으로 소개된 용순 씨의 수제비 맛이, 수제비하면 사족을 못 쓰는 내가 기대한 내 어머님표 수제비보다는 훨씬 덜한 맛이었으나, 그래도 중간쯤 얼큰한 맛의 수제비와 감자전을 안주로 마시는 동동주의 맛은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삶의 소소한 기쁨이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이라는 말은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니 또 다른 설렘이다.

매번 산을 오를 때마다 저질 체력과 굳이 정상까지 가야하나? 하는 물음과 싸우곤 해요. 그러나 그러면서도 몸은 항상 정상에서 바람에게 체온을 주고 있고, 대신 정상의 바람이 주는 향기를 마시며 에너지를 보충하곤 하죠. 수락산은 오르는 것이 힘든 것이 아니라 코스마다 오르기 전 흘낏 바라보고 지레 판단하는 시간이 고달픈 산이었어요. 아주 오래 전 젊은 시절 아무 생각 없이 뛰어오르던 수락산은 이제 없었지요. 수락산은 이제 아무에게나 손을 맞잡고 등정을 수락(?)하는 산이 아닌 준비된 자에게만 미쁜 하례를 허락하는 고마운 도시의 심장이 되어 있었던 겁니다. 진정으로 산을 사랑하고 아름다운 성정을 보유한 마음씨 맵시 고운 선남선녀의 가슴 깊이 그리움의 언어를 달궈놓고 있었던 한울님께서 남겨주신 보약(補藥)이었던 겁니다.

조선시대 수락산 내원암에 머물던 정허거사라는 스님이 노래했다는 “수락8경(水落8景)”을 읊으며 수락산의 아름다움을 찾는 나그네의 등산화에 곱게 익은 단풍 하나가 떨어져 내립니다.

 양주라 수락산을 예 듣고 이제 오니
아름답게 솟은 봉(峰)이 구름 속에 장관일세
청학동(靑鶴洞) 찾아들어 옥류폭(玉流瀑)에 다다르니
거울 같은 맑은 물이 수정 같이 흘러가네.
푸른 송림(松林) 바윗길을 더듬어 발 옮기니
백운동(白雲洞)의 은류폭(銀流瀑)이 그림같이 내리쏟고
자운동(紫雲洞)에 돌아들어 금류폭(金流瀑)을 바라보니
선녀 내려 목욕할 듯 오색서기 영롱쿠나.
미륵봉의 흰 구름은 하늘가에 실려 있고
향로봉의 맑은 바람 시원하기 짝이 없네.
칠성대 기암괴석 금강산이 무색하고
울긋불긋 고운 단풍 그림인 듯 선경인 듯
내원암(內院庵) 풍경 소리 저녁연기 물소리에
불로정 맑은 약수(藥水) 감로수가 이 아닌가
선인봉 영락대에 신선 선녀 놀고 가니
청학(靑鶴) 백학(白鶴) 간 곳 없고 구름만이 오고 가네.

 

 박철민 편집위원 chulminpark@koreanewstoday.net